- 출판사(주)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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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소라
- 일러두기
2020년 6월 6일에 추첨했던 914회차 〈로또 6/45〉의 1등 당첨금 1,950,005,557원은 지급 기한 만료일인 2021년 6월 7일까지 미수령 상태로 당첨자를 기다리다가 지급 기한을 넘겨 복권기금에 귀속되었다. 이 글은 ‘만약에 내가 914회차 1등에 당첨되어 1년을 보냈다면?’이라는 가정 아래 작성한 당첨 후기이다. 질문 목록은 동행복권 사이트의 당첨자 인터뷰를 참고했다
▶복권 판매점 : 동행복권 사이트(http://dhlottery.co.kr)
▶ 당첨되신 걸 어떻게 알게 되셨고, 또 알았을 때 기분이 어떠셨나요?
라면에 맥주를 마시면서 추첨 방송을 보고 있었습니다. 배우자가 저녁 약속이 있던 날이라 집에 강아지와 둘이 있었는데요, 세 번째 숫자까지는 먹으면서 보다가 네 번째 숫자부터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몇 분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고 귀도 먹먹했습니다. 마지막 숫자까지 일치하는 걸 실시간으로 확인한 뒤엔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자는 강아지 위에 엎드려 잠깐 울었고요.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아서 바닥에 계속 엎드려 있었습니다. 심장은 물론이고 온몸이 떨렸지만 이럴 때일수록 ‘일을 그르치지 말자’고 되뇌었습니다. 모든 행동에 신중하자고 다짐했고요. 흥분하지 말자, 긴장하지 말자 그런 생각을 하면서요.
심호흡을 계속하면서 동행복권 사이트에 나와 있는 당첨금 지급 안내 정보를 꼼꼼히 알아보고 집에서 서대문까지 가는 길도 찾아보다가, 혹시라도 들떠서 일을 망칠까 봐 남은 맥주를 버리고 얼른 누웠습니다. 갈수록 정신이 또렷해져서 누운 채로 밤을 꼬박 새웠고요. 원래 잠이 안 오면 유튜브나 트위터 같은 것을 계속 보는데 그날은 휴대폰 전원도 꺼두었습니다. 화장실 가는 것도 조심스러웠고요. 당첨 사실을 알게 된 순간도 그렇지만 그 이후에도 기쁨을 만끽하기보다는 침착하자, 정신 차리자 이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어마어마한 행운인 만큼 걱정스럽고 불안하기도 해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 특별히 기억에 남는 꿈이 있으신가요?
전날 밤에 꿨던 꿈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비행기를 타고 밀라노에 내렸는데 공항 근처에 큰 호수가 있었습니다. 거의 바다로 보이는 규모였고 고기잡이배가 많았습니다. 하얀 배들이 연달아 정박 중인 호숫가의 자갈밭을 걷다가 그물을 정리하고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때 한창 밤을 새워가면서 보던 넷플릭스 시리즈의 주인공과 외모가 같았습니다. 예약한 숙소의 주소를 보여주면서 여기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주소를 보더니 자기 집이랑 가깝다고 알려주겠다고 하더라고요. 같이 걷는데 옆에 있는 차도로 레미콘보다 훨씬 큰, 거의 비행기만 한 차들이 잇따라 지나갔습니다.
한참 걸어서 도착한 숙소는 폐가 같은 곳이었습니다. 예약할 때 본 사진하고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고요. 숙소 주인과 연락도 두절돼서 잠깐 망연자실하긴 했지만 여행에서 흔히 있을 법한 일이라 그러려니 했습니다. 살아 있으면 뭐 어떻게든 방법을 찾겠지 싶으면서도 약간 어이가 없어서 웃었습니다. 그 사람이 저를 보고 이런 상황에도 웃다니 되게 밝다고 말했고, 살면서 밝다는 얘긴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고 대답하면서 또 웃었고요. 배낭도 무거워 보이는데 새 숙소를 구할 때까지 일단 자기 집에 짐이라도 보관하겠느냐고 물어서 고맙다고 하며 따라갔습니다.
그의 집은 단층 건물이었는데 입구에서부터 얇은 여름 커튼 같은 천이 겹겹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밖은 낮이라 환했지만 집 안은 조금 어두운 분위기였고요. 그게 캄캄하고 무섭기보단 천이 겹쳐진 부분이라 포근한 느낌이었습니다. 천은 홍시 껍질 같은 색이었습니다. 천장에 매달린 천들을 헤집고 다니다 보면 이쪽에 주방이 있고, 또 저쪽에는 방이 있고. 그래서 여기저기 구경했습니다. 천 사이를 천천히 오가며 스치는 느낌이 부드러웠고요.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하며 제가 먼저 그를 안았습니다. 가벼운 인사로 시작한 포옹이 길어졌고 이렇게 글로 쓰자니 전개가 갑작스럽지만, 꿈에서는 더없이 자연스럽게 섹스로 이어졌는데요.
그것은 상상으로도 해본 적이 없는 섹스였습니다. 정말이지 너무 좋아서 이 섹스가 끝날 바엔 세상이 끝나길 바랐습니다. 지금 이대로 모든 게 끝났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요.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 이미 죽은 것 같기도 했고요. 현실이든 꿈이든 이런 섹스를 해본 것만으로 태어나길 잘했다, 여기서 죽어도 크게 아쉽거나 억울하진 않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후에도 배 안이 간질거리고 얼얼해서 한참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유럽에는 가본 적이 없는데 밀라노라니요. 그리고 꿈이니까 따라갔지, 현실이었다면 아무리 그 배우와 같은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을지라도 혼자 공항에서 밤을 새는 쪽을 선택했을 겁니다. 혹시 그 배우가 이탈리아계 미국인인지 구글에 찾아봤지만 원래 알고 있던 대로 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습니다. 몸에 감기던 붉은 천의 감촉이 종일 잊히지 않았는데, 그날 저녁에 구매했던 로또가 당첨이 되었습니다.
▶ 당첨이 되기 위한 본인만의 전략이나 구매 방법이 있으셨나요?
작업을 마칠 때마다 기념 혹은 보상으로 로또를 샀습니다. 책이 나오는 날이기도 했고, 인쇄소에 파일을 넘긴 날이기도 했고, 작게는 원고 하나를 마감한 날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마감이 잘 안 풀리는 날에는 복권 구매가 큰 동기로 작용해서 ‘이걸 다 쓰면 로또를 살 수 있다!’라는 마음으로 작업을 했습니다. 뽀모도로 기법이나 장소 바꾸기 등 이것저것 시도해봤지만 저게 제일 집중이 잘되는 방법이기도 했고요.
작년에는 메일링 서비스로 매주 월요일마다 글을 한 편씩 연재해서 주로 일요일 저녁에 샀습니다. 월요일 자정을 지나서 늦게 마감한 주에는 일종의 벌처럼 생각해서 구매하지 않았습니다. 복권을 사기 위해서 마감을 잘 지키게 되는 뜻밖의 순기능이 있었고요.
특별한 전략 같은 건 없고 늘 인터넷으로 샀습니다. 학생 때 시험 보듯이 사인펜으로 카드를 칠하는 과정이나 복권 명당이라고 불리는 곳들이 궁금하긴 했지만 직접 가서 산 적은 없습니다. 한 번에 5천 원씩, 대부분 자동으로 샀습니다. 당첨된 로또도 자동이었습니다. 아주 가끔 수동으로 구매할 때는 구매 날짜나 시간, 제 생일과 나이 같은 걸 주로 골랐습니다. 5등만 세 번 했고 나머진 다 낙첨이었습니다.
당첨 결과와 무관하게 동행복권 사이트의 당첨자 인터뷰 게시판을 자주 들어갔습니다. 인터뷰 답변을 길게 한 분들도 있고 짧게 한 분들도 있는데 사연이 가지각색이라 재밌었습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소감은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못 이기고, 즐기는 자는 얻어걸린 자를 못 이긴다!”였는데, 낙첨되었을 때도 저 소감을 떠올리면 왠지 웃겨서 그래, 다 우연인데 너무 속상해하지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 평소에 어떤 복권을 자주 구매하셨나요?
자주 구매한 복권은 로또입니다. 예전에 사귀던 친구가 저랑 헤어지던 날에 로또를 샀는데, 늘 5등만 되다가 그날 처음으로 4등에 당첨돼서 이별의 아픔을 극복하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는 얘길 듣고, 저도 마음을 회복해보려고 구매한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고심 끝에 고른 번호 가운데 단 하나도 일치하는 것이 없어서 더 슬펐던 기억이 있고요. 그 후로는 대부분 자동으로 샀습니다.
로또 다음으로 많이 구매한 건 즉석식 인쇄 복권인 스피또였습니다. 집에 놀러 온 친구가 선물로 준 스피또를 긁었더니 천 원에 당첨돼서 그걸 현금 대신 새 스피또로 교환했던 게 처음이었고요. 그때 이후로는 스피또도 인터넷으로만 가끔 샀고, 첫 번째 당첨 이후로는 천 원에 당첨되는 경우도 없이 전부 꽝이었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간혹 연금복권을 구매하기도 했습니다. 스피또를 준 친구 말고 또 다른 친구가 전세로 이사하던 해에 집들이 선물로 두 장을 건네면서 자기는 그걸 진짜 연금을 준비하는 자세로 꾸준히 산다고 하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저도 그 친구 얘기를 듣고 특별한 날, 예를 들어 새로운 계약을 하거나 원고료가 들어온 날에 몇 번 샀는데 역시 당첨된 적은 없었습니다.
▶ 당첨금은 어떻게 사용하셨나요?
세금 약 6억 원을 제하고 13억 원을 수령했습니다. 통장에 찍힌 열 자리 숫자를 아무리 다시 세어도 믿기지 않았는데요, 사실 당첨 후기를 작성하고 있는 지금도 모두 꿈같습니다. 우선 수령 당일에 은행에서 받았던 모든 대출금을 상환했습니다. 1년 전 이사하면서 받은 버팀목 전세자금 대출 1억 2천만 원과 직장에 다니던 시기에 받았던 신용대출 3천만 원, 그리고 한도가 천만 원이었던 제2금융권의 마이너스통장을 없앴습니다. 그다음 주에는 독립할 때와 결혼할 때 양친께서 지원해주신 2천 5백만 원을 돌려드렸습니다. 태어난 이래 개인 혹은 기관에 갚아야 할 돈이 없는 상태에 놓인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돈벼락을 맞고서야 다 갚을 수 있었던 걸 보면 애초에 빚을 지지 않고 산다는 게 돈벼락을 맞을 확률과 비슷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두 달쯤 지나 24평 아파트를 7억 5천만 원에 매매했습니다. 중개 수수료, 취득세 등 부대 비용은 2천만 원 조금 넘게 들었고요. 원래 살고 있던 동네 근처인데 산과 더 가깝고 대단지 가장자리에 있는 동 12층이어서 시야가 탁 트입니다. 지어진 지 딱 10년 된 아파트로 별다른 불편함도 없고 보기에 적당해서 인테리어 공사 없이 살고 있습니다. 주변이 잘 되어 있어서 강아지랑 산책하기도 좋고요. 최근에 같은 동 10층이 9억 8천만 원에 거래되었다고 들었는데 당분간 이사 계획은 없습니다.
생일 때마다 10만 원에서 20만 원씩 후원하던 비영리 시민단체 두 곳에 1억씩 기부하고 남은 돈 대부분은 주식에 투자했습니다. 기존에 한 주에서 다섯 주 정도로 소량 보유하고 있던 국내 주식은 IT, 금융, 자동차, 포장재 업종으로 총 네 종목이었는데 종목 추가 없이 보유량만 늘렸습니다. 전부 코스피 상장사들이고, 수익률은 51퍼센트 정도네요. 당첨 이후 새로 추가한 종목은 프랑스 주식 두 종목으로 가방으로 유명한 브랜드들입니다. 처음 살 때 한 주당 58만 원, 111만 원 정도였는데 반년하고 조금 더 지난 사이 84만 원, 144만 원으로 올랐네요.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매도하지 않고 오래 가져갈 생각입니다. 빚 외에 크게 쓴 돈은 집, 기부, 주식 정도인 것 같습니다.
▶ 덧붙여서 하고 싶은 말씀은?
갑자기 큰돈이 생기면 좋았던 관계에도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들어 언젠가 그런 일이 생긴다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할지라도요. 양친께서 지원해주셨던 돈을 돌려드릴 때에도 일이 잘 풀리는 중이라고 둘러대며 당첨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자세히 묻지 않으신 덕분에, 그 후로도 지속적으로 연금처럼 드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배우자의 자동차 할부 중도 상환 과정에서 생겼습니다. 결혼 전 제가 전세로 살던 오피스텔에 살림을 합친 것이어서 집은 제 명의, 자동차는 배우자의 명의였고 당첨 당시 남은 할부금은 2천만 원 정도였습니다. 양친께 돈을 돌려드렸던 날 저녁, 배우자의 통장으로 2천만 원을 이체했습니다. 최근에 했던 프로젝트가 잘 풀렸다고 말했고요. 그는 의심했습니다. 갑자기 이런 돈이 어디서 났냐며 캐물었고, 제가 말없이 마이너스통장을 만들어 주식에 투자했다가 손실을 입었던 일을 들먹였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아이고, 저러다가 내일 되면 또 미안하다고 할 거면서……’ 하는 마음으로 달래고 기다렸을 텐데, 그날은 그 달램과 기다림에 의문이 생겼습니다. 왜 달래고 기다려야 하는지 아무리 따져봐도 ‘짜증 나게 왜 저러지?’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습니다.
로또에 당첨되기 전부터 복권 당첨자들의 후기나 인터뷰에서 이혼 사례를 많이 접했습니다. 이혼을 앞둔 부부 당사자가 지니는 복권 당첨금의 법적 권리에 대한 사회면 기사도 적잖았고요. 그런 걸 보면서 왜 당첨되면 다들 이혼을 할까 궁금했는데, 당사자가 되고 보니 참을성이 없어지기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을성보단 참을 필요가 더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더는 달래거나 기다리지 않기로 결정하기까지 하루도 안 걸렸고요.
몇 십 년 지나 ‘그때 내가 돈보다 더 중요한 걸 잃었구나’ 하고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후회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어요. 다행히 아직까진 후회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피임 실패와 계류유산이 아니었다면 계획에 없던 결혼이기도 했고요. 생뚱맞지만 그 꿈의 영향도 좀 있었는데, 그 꿈을 꾸고 나니까 배우자와의 섹스를 꺼리게 되었습니다. 실제 섹스를 하고 나면 꿈속의 황홀했던 느낌이 점점 옅어질 것 같았고, 시공을 초월했던 환각을 섹스에 대한 마지막 기억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벼락같이 떨어진 거액을 이 정도면 꽤 조리 있게 썼다고 자평합니다. 주식 보유량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관련 공부를 시작했는데, 지난달엔 한국금융투자협회에서 주관하는 ‘증권투자권유대행인’ 자격시험과 ‘펀드투자권유대행인’ 자격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제가 받은 행운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 줄 수 있을 만한 일을 찾고 있습니다. 당첨 후기를 읽어주신 분들께도 제 행운의 조각이 닿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임소라
작가. 소설집 『언제나 양해를 구하는 양해중 씨의 19가지 그림자』, 에세이집 『서울, 9개의 선』 『도서관람』 등이 있다.
[출처] 에픽 Epiic (1년) (2021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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