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가슴으로 낳은 나의 딸, 미치코 / 박경서, 대한적십자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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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가슴으로 낳은 나의 딸, 미치코 / 박경서, 대한적십자사 회장
  • 출판사월간에세이
  • 잡지명월간에세이

 
 
우리는 매일 누군가와 만나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세계교회협의회(WCC) 아시아정책위원회에서 18년간 근무한 나 역시 전 세계 120개국을 넘나들며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났다. 티베트의 정신적 지주 달라이 라마, 김일성 주석,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 아웅 산 수지, 그리고 독일 통일을 이끈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독일 전 대통령까지…. 모두가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사람들이지만, 내 가슴 깊이 남아 있는 가장 의미 있는 만남은 수양딸, 미치코와의 인연이다.
미치코와 나의 인연은 1987년 1월, 중국 베이징에서 시작되었다. 중국 교회 원조를 위해 베이징을 찾은 나는 조선족 대표들과 만나 그들의 요구 사항을 들었다. 요구 사항 대부분이 WCC 아시아국의 원조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지만, 나는 회의장 구석에서 조용히 고개를 흔들던 어느 여학생의 모습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결국, 생각해보겠노라며 대표자들을 돌려보낸 후 그 여학생에게 이유를 물으니 “평화롭던 제 고향 랴오닝성은 캐나다의 지원금 때문에 마을이 분열되었어요. 선생님의 원조는 우리에게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오랜 시간 기아와 전쟁, 인권 유린으로 고통을 받는 이들에게 인도적 원조를 진행하면서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기에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고개를 흔들던 소녀가 바로 미치코다.
미치코의 한국 이름은 정광자.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 그녀의 아버지는 1930년대 할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이주했고, 대학시절 학생 조직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티베트 근방으로 유배되었다. 미치코가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날은 1년 중 단 이틀뿐이었단다.
“저의 대학 입학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저에게 축하 편지를 쓰셨지만, 오랜 유배 생활로 쇠약해져 편지를 부치지도 못하고 쓰러지셨어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간 나를 기다리는 건 유배지에서 쓸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시신과 그 옆에 놓여 있는 편지 한 통! 그 편지는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피로 쓴 아버지의 유서였어요.”
일본어를 더욱 열심히 공부해서 한국, 일본, 중국이 화해하고 협력하는 날을 위해 노력해달라던 아버지의 편지. 조국을 잃고 제3국에서 살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민족의 슬픔이 미치코의 가족사에서 고스란히 느껴져,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미치코를 돕고 싶었던 나는 WCC로 돌아와 그녀의 소원인 ‘일본 유학’을 주선했다. 당시 조선족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 위해서는 중국 정부의 허락이 필요할 정도로 규제가 심했고, 일본 대학원의 초청장도 있어야 했지만, 나는 한국·일본·중국의 현대사가 얽힌 미치코 가족의 삶, 숱한 역경을 이겨내고 올곧게 성장한 미치코에게서 동북아의 평화와 화해의 단서를 찾았다. 그래서 반드시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야 한다며 중국과 일본 측 지인을 모두 설득했다. 결국 내가 미치코의 1년 학비를 낸다는 조건을 내걸고 뜻있는 많은 사람이 노력한 끝에, 그녀는 1988년 교토의 도시샤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미치코는 이후 대학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일본의 전자 기업에 입사한 후 일본인 남자와 결혼했다. 그녀의 결혼식에 초대받은 나는 그녀의 성장 과정을 소개하며 “이 친구들 세대에는 한국, 중국, 일본의 동북아 평화 공동체가 이루어지길 소망하며 이 꿈이 실현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협력합시다”라고 당부했다. 
현재 미치코는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교류에 힘을 보태고 있다. 한국어 강사이자 일본 오사카 검찰청의 공식 통역사로 활동하며 3국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를 세상에 전하고 싶단다. 홀로 앞서가려 하지 않고, 함께 나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가슴은 한없이 흐뭇하다. 30년이 지난 오늘까지, 아들만 둘인 우리 부부에게 친딸과도 같은 미치코. 나의 가장 소중한 인연, 가슴으로 낳은 나의 딸, 미치코가 열어갈 내일에 항상 축복과 평화가 함께하길 바란다.


*1939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를 거쳐 독일 괴팅겐대학교 사회학 박사. 서울대 교수, 제네바 세계교회협의회(WCC) 아시아 정책위원회 의장 및 아시아 국장, 대한민국 초대 인권대사 등 역임, 저서로는 <인권이란 무엇인가>(2012), <평화를 위한 끝없는 도전>(2018) 등 다수. 황조 근정 훈장(2005)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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