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의 窓] 모든 건 남쪽으로 난 창문 덕분이었네 /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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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박성희의 窓] 모든 건 남쪽으로 난 창문 덕분이었네 /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
  • 출판사월간에세이
  • 잡지명월간에세이 Essay

5년 넘게 키우던 ‘목향’ 화분에 새끼손톱보다 작은 꽃봉오리가 달리자 나는 확신했다. 역시 나는 식물을 잘 키운다. 그 희귀한 꽃에서 나는 향기가 마치 나의 숨은 재능이 내뿜는 향기 같았다. 화분이 터져나갈 듯 쭉쭉 자란 ‘뱅골 고무나무’의 분갈이를 해줄 때, ‘호야’ 줄기가 베란다를 밀림처럼 감싸고 마침내 초콜릿 향이 나는 사방 형태의 꽃망울을 터뜨릴 때, 10년마다 꽃을 피운다는 야자수 계통의 나무가 가늘고 긴 줄기를 끊임없이 내더니 그 사이에서 진귀한 꽃대를 내밀 때, 나의 ‘식물부심(식물+자부심의 신조어)’은 계속됐다. 내 이야기를 들은 지인은 이 모든 걸 이력서에 적었다가 은퇴 후 식물원이나 수목원 관리직에 지원해 보라고 농담처럼 건네곤 했다.

나의 재능에 의문을 품게 된 것은 어느 날 오전 일찍 학교에 온 날이었다. 마치 천상의 축복처럼 햇빛이 다발로 쏟아진 그날, 줌(ZOOM) 수업을 하려고 책상에 앉은 나는 데스크톱 컴퓨터가 햇빛에 반사되어 볼 수가 없었다. 강한 햇살을 피하기 위해 블라인드를 치며, 나는 매일 아침 연구실을 들이닥친 이 무지막지한 햇빛의 위력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창가 책장의 책들의 빛바랜 표지와 함께, 창가에서 목욕하는 선녀처럼 행복해하는 나의 푸른빛 반려식물이 눈에 들어온 순간, 나는 모든 게 나의 재능과는 무능한, 남쪽으로 난 창문 덕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본디 과학적 사고란, 일관성 속에서 상이점을 찾아내거나 상이함 속에서 일관성을 발견하면서 훈련되는 것이다. 나의 식물들이 일취월장하게 된 것은 북향으로 난 연구실에서 지금의 남향연구실로 이사 온 후 벌어진 일이다. 북향 연구실에 있을 때는 논문과 육아에 치어서 사는 주니어 교수 때여서 식물에 눈길을 줄 틈이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식물이 하나 있긴 했는데 아무리 물을 줘도 자라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지금 생각하니 햇빛이라는 절대적 양분이 부족했던 탓이다. 

어느 해 연말에는 사회과학대학에서 작은 ‘산호수’ 화분을 모든 교수들에게 선물로 나눠 준 적이 있었다. 몇 학기가 지난 후 어떤 교수는 자기가 식물을 잘 키워 빨간 열매가 맺혔다고 자랑을 하는데, 그렇지 못한 교수들은 자신의 무재능을 탓하며 기가 죽어 있었다. 이제 기억을 더듬어보니 산호수에 열매가 맺혔다고 자랑하던 이들은 하나같이 남향 연구실을 차지한 교수들이었다.        

자신의 뛰어난 재능을 믿거나 혹은 무능을 탓하는 모든 이에게 나는 나의 창문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문제는 네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식물을 키워주는 남쪽으로 난 창문 같은 것이 있을지 모르니 고개를 들고 한번 찾아보라고 말이다. 그것은 부모의 사랑과 희생일 수도, 자유민주국가에 태어난 복일 수도, 아니면 21세기 문명을 누리고 사는 현대인의 특권일 수도 있다. 그러니 주변을 둘러보고 감사하고 겸손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생각하면, 누군가가 남향으로 터를 잡고, 창문을 내준 이가 있을 것이다. 거기서 들어오는 햇빛 때문에 지금껏 따듯하고 배부르게 산 것이다. 그 큰 틀을 무시하고 탓하며 섣불리 집을 허물고 창문을 막는 건 어리석음을 넘어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마치 예전 내 북향 연구실에서 속절없이 죽어간 이름 모를 관엽수처럼.

나의 오랜 동료 겸 친구 중 주말농장을 취미로 일군 이가 있다. 작은 땅에서 고구마며 방울토마토를 수확하더니 요즘 제법 튼실하게 길러낸 무와 배추를 인스타그램에 올리며 자랑한다. 마침 회사에서 정년을 맞아 은퇴한 그는 자기가 농부 체질이라며 농사지을 땅을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자신이 시골 출신이라 역시 식물들이 자기를 알아본다고 자신감에 넘쳐있는 그에게 나의 ‘남쪽 창문’ 이야기를 해줄까 말까 고민 중이다. 



식물
-식물계에 속하는 생물
-나무, 풀 등이 여기에 속함
-광합성을 하여 녹말 등의 광합성을 만드나, 일부 기생식물이랑 공생식물처럼, 엽록소를 잃고, 대신 직접 포식하거나, 기생, 공생 등으로 양분을 얻는 종도 있음
< 작성자 : 김태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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