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이름 없음의 이름 값 / 박수현, 더불어민주당 홍보소통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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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만남] 이름 없음의 이름 값 / 박수현, 더불어민주당 홍보소통위원장
  • 출판사월간에세이
  • 잡지명월간에세이 Essay

2008년 여름은 유난히 뜨겁고 가혹했다. 나의 20대는 치열했지만, 30대에 시작된 삶의 고통은 40대 초반인 그해 가장 극심했다. 

초등학생 때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된 나는, 고등학교 때는 사제가 되려는 열망에 휩싸일 정도로 신앙에 열심이었다. 자연스럽게 삶의 고통은 한편으로는 극복의 의지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위로와 회피로 신앙에 의지하는 바가 커져갔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친 듯이 믿음에 매달렸고, 온몸의 세포들까지도 신을 향해 열려있는 느낌이었다. 나의 흐느낌은 위로를 받았고, 나의 절망은 때때로 거짓말처럼 희망이 되기도 하였으며, 또한 서울 동창회에 다녀올 왕복 버스비 2만 원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나의 가난은 때때로 마음의 부자로 변모하기도 하였다.

그 무덥고 아팠던 여름에 나는 길을 떠났고, 어느덧 청양 다락골에 닿았다. 그곳은 ‘줄무덤’이라고 불리는 천주교 성지였다. 날갯죽지를 다친 황새가 뜨거운 물이 솟는 곳을 찾아 상처를 스스로 치료했다는 전설처럼 내 영육(靈肉) 간 통증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병인년 천주교 박해 때 홍주성에서 처형당한 신자들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둘러업고 가파른 백 리 산길을 어둠에 의지해 이곳으로 옮겨서 매장했다는 곳이다. 누가 볼까 무서워 땅도 제대로 파지 못하고 묘비는커녕 봉분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관도 없이 그냥 대충 살아남은 자의 등에 업혀 도착하는 순서대로 줄지어 눕혀놓고 한 줌 흙으로 덮였을 것이다. 온통 없는 것투성이다. 심지어는 잘린 목 따로 몸 따로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무명순교자 줄무덤’이 되었다. 

뙤약볕에 녹아내릴 듯이 이글거리는 아스팔트길의 끝에서 나지막한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할 즈음, 내 눈앞에 나타난 37기의 줄무덤! 

눈 감아도 떠오르는 선명한 한 장의 사진처럼 내 망막에 기록되어 있는 이 장면이 지금까지의 내 인생 중 가장 중요한 ‘만남’으로 나는 기억한다. 왠지 모를 경외심과 동정심이 일었고, 서슬 퍼런 관장의 심문과 고문에도 꺾이지 않고 신앙을 지켰음에 감사했으며, 목이 잘리는 순간에도 승리의 월계관을 씌워주신 하느님을 찬양했던 순교자들의 용기에 두려움마저 일었다.  

그런 몽환 같은 묵상 중에 언뜻 스치는 질문과 대답이 동시에 들리는 듯했다. 

‘이분들은 왜 이름도 남기지 못하여 무명의 순교자가 되었을까?’ 

그 대답은 이랬다. 

‘이분들은 하느님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가장 귀한 목숨을 드렸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여 개똥이나 막쇠 같이 천하디 천한 이름까지도 다 드려 이름조차도 남지 않은 것이 아닐까?’ 

무명이지만 이렇게 귀한 이름이 또 있을까.

그 당시 나는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하는 햇병아리 정당인이었다. 나의 이름을 한 자라도 더 알리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그러나 이름마저도 사랑으로 봉헌한 분들의 초라한 무덤 앞에서 그 잘난 이름만 세상에 알리려고 노심초사하는 내 모습은 너무나 천박해 보였다. 

이름까지 버림으로써 순례자들을 부르는 위대한 이름을 얻은 순교자들 앞에서, 1그램의 무게도 되지 않은 초라한 이름을 세상에 알리려는 나를 돌아보았고, 그해 여름의 이 깨달음은 지금까지 내 인생의 지표가 되었다. 나는 기왕에 이름을 알려야 하는 정치인이 되었으니 이름값을 제대로 하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해 여름, ‘이름 없음의 이름값’을 가르쳐준 줄무덤과의 만남은 그렇게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되었다.

* 1964년 충남 공주 출생. 서울대 서양사학 자퇴 제적, 연세대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사회복지전공).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의정대상(2016) 등 수상. 저서로는 <차마 돌아서지 못하는 마음><박수현의 고속버스 의원실>. 제19대 국회의원, 대통령비서실 대변인, 국회 국회의장 비서실장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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