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人터뷰] 한줄기 빛과 같은 / 김혜자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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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아름다운 人터뷰] 한줄기 빛과 같은 / 김혜자 배우
  • 출판사월간에세이
  • 잡지명월간에세이 Essay

“내 삶은 때로는 불행했고 때로는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래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마침표가 되어준 배우 김혜자의 묵직한 내레이션은 생을 감각하며 삶에 공명한다. 이 먹먹한 울림은 백상예술대상(2019) 대상 수상 소감을 통해 다시금 서향(書香)처럼 스며들었다. 완연한 생이 아득한 삶을 끌어안을 때 우리는 희망을 정시하게 된다. 연기 인생 반세기를 훌쩍 넘긴 이 대배우의 여정에도 뚜벅뚜벅 정직한 시간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다. 어느 봄날, 내면의 부름켜로 삶의 나이테를 품어온 그녀를 만나보았다. 햇살이 내어준 길 위에서 환한 미소를 짓는 그녀의 계절은 ‘청춘’이었다. 

“유치원 때 연극 <생의 제단>으로 처음 무대에 섰어요. ‘혜자’라는 아이 역할이었죠. 어릴 때는 배우가 뭔지 잘 몰랐지만 무대에서 하는 걸 하고 싶었어요. 독서도 참 많이 했는데, 책 읽다가 새벽 3~4시에 잠들면 학교에서 졸고(웃음). 낭독을 잘했는지 국어 시간에 만날 책 한번 읽어보라고 하셨죠. 생각해보면 배우는 하나님이 주신 좋은 직업 같아요. 아무 재주도 없는데 연기하는 삶을 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즐겁고 사람들도 좋아해 주니 정말 감사하죠.” 

7살 때 첫 출연한 연극과 영화 <마더>(2009), 드라마 <청담동 살아요> (2011~2012)와 <눈이 부시게>(2019)에서 그녀는 ‘혜자’라는 배역을 맡았다. <디어 마이 프렌즈>(2016)에서는 본명이 연상되는 ‘희자’역으로 분했다. 본명을 차용한 인물로 거듭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김혜자’라는 레퍼런스에 담긴 함의, 즉 보편성과 특수성이 절묘하게 빚어낸 고유성에 기인한다. 그녀만의 오리지널리티는 격과 파격을 넘나들며 타성에 젖지 않으려는 연기적 변주에 있다. 드라마 <전원일기> (1980~2002)와 <여(女)>(1995)를 관통하며 충돌하는 모성 이미지는 영화 <마더>에서 모성애의 양면성을 형상화하며 모순의 미학을 극대화했다.   

“제 연기의 변곡점은 <마더>일 거예요. 엄마를 그렇게 그릴 거라곤 생각 못 했죠. 그런데 봉준호 감독이 3~4년 전부터 이런 작품을 쓰고 있다고 해주셔서 할 때 새로운 역이라는 느낌은 덜했어요. MBC <여>를 보고 기획하기 시작했대요. 설득력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줬는데 감독이 기획을 잘한 거죠. 엄마는 자식을 위해 죽을 수도 죽일 수도 있어요. 참 묘한 존재죠. 그리스 신화 같은 데만 봐도 생각지도 못할 일을 하잖아요. 굉장히 많은 걸 느낀 작품이에요.”

그녀의 필모그래피는 ‘시대’라는 프리즘에 통과된 ‘여성’ 캐릭터의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펼쳐진다. 대체 불가능한 독보적인 캐릭터를 완성하며. 특히 보통 명사로서의 ‘엄마’가 사회라는 세계에 길항하며 어떻게 고유명사가 되어 가는지 예리하게 파고든다. 중요한 건 삶의 명암과 미추, 그 자장 안에 있는 여명, 즉 희망의 메시지다.

“같은 여자, 비슷한 역할은 하기 싫어요. 지루해서도 못하죠. 제가 지루하면 보는 사람도 지루하잖아요. 저는 제가 감당할 수 있겠다 싶은 좋은 작품을 선택하려고 해요. 현실이 아무리 비참해도 정신적으로 쳐다보는 데가 있고, 보는 사람에게 바늘 끝만 한 희망을 줄 수 있는 게 우선이죠. 작품을 하면서 저도 치유를 받아요. 그렇게 몇 달을 그 인물로 살다 보면 작품이 끝나도 쉽게 빠져나오기 힘들더라고요.” 

나이듦은 삶의 밀도를 높여 내면의 질량을 늘려가는 것이다. 그녀는 순수성을 잃지 않고 세상을, 사람을 맑은 눈으로 대하며 낡지 않고 늙어감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110분간 아이부터 할머니까지 1인 11역을 소화해낸 연극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2013), 그리고 드라마 <눈이 부시게>는 외면과 내면의 시차를 크게 벌리지 않고 인물의 당위성을 확보했다. 

“양쪽을 완벽하게는 아니어도 이상하지 않게 할 수 있어서 감사해요. 제겐 분명 아이 같은 면이 있어요. 얼굴은 늙어버렸지만 마음속에는 아이가, 소년·소녀가 있을 수 있잖아요. 힘든 작품도 책(대본)을 미리 받아서 읽고 또 읽으면 웬만큼 어렵진 않아요. 모든 연극이 그렇지만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는 모노드라마라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했죠. 마냥 아이처럼만 할 수도 없고…. 다만 뜻을 잘 전달하려고 노력했어요.”

등가교환의 법칙과 오로라의 역설. 드라마 <눈이 부시게>는 주제를 견인하는 이 명제들로 눅진한 삶의 아름다움과 찬란한 진실을 ‘눈이 부시게’ 그려냈다. “시간이야말로 모두에게 주어진 가장 공평한 것”이라고 말한 그녀가 꼽은 인생의 가장 의미 있는 등가교환은 무엇일까.

“배우가 되고 잘한 일은 아이들을 돕는 거예요. 귀중한 무언가를 내놓지도 않았지만, 말하자면 시간과 돈이 좋은 일에 쓰이잖아요. 물론 비할 수 없는 많은 걸 얻었죠. 등가교환이라는 말에 딱 들어맞는지는 모르겠어요. 저는 오랜 시간 비행기를 타고 흙바닥에서 침낭 깔고 자는 게 별로 안 불편해요. 속도 내장도 튼튼하게 타고났고 의외로 겁도 없고 담대해요(웃음). 아프리카, 생각보다 힘들지 않아요. 오히려 저는 정신적으로 더 건강해졌죠. 내가 힘든 건 아무것도 아니야, 하며.”

배우의 길을 내디디려고 할 때 그녀의 아버지는 진심 어린 조언으로 그녀를 격려했다고 한다. 톨스토이가 세상에 많은 영향을 미쳤듯이 배우의 한마디가 정치인의 백 마디보다 위대할 수 있으니 늘 공부를 많이 하라고. 그 웅숭깊은 말씀처럼 그녀는 연기자로서, 월드비전 친선 대사(1991~)로서 나눔을 실천하며 선한 영향력을 전하고 있다. 지문과 같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사랑만이 희망’임을 강조하며. 과연 말씨는 마음씨에서 발아되는 것이었다. 

“혹시 아이들이 굶을까 봐 돈이 생기면 미리 냈을 뿐이지 깊은 뜻은 없어요. 후원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책임져야죠. 아기들이 젖을 못 먹어서 입을 달싹달싹하는데 축여줄 물도 없고…. 웬만큼 가난한 건 낭만적이기도 해요. 그런데 절대적인 빈곤은 다르죠. 인간에게는 모른 척할 수 없는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하는 것은 봉사도 베푸는 일도 아니죠. 그런 데 다니면 웬만해서는 불평 거리가 없어져요.”

한번은 김정수 작가가 이런 말을 건넨 적이 있다고 한다. “선생님은 왠지 연기 끝 장면에서 돌아가실 것 같아요.”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창작자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주며 작품의 필요충분조건으로 존재해온 그녀는 다양한 인물을 핍진하게 살려내고 살아냈다. 삶의 정면에서 이면을, 생의 직선에서 곡선을 읽어낸 그녀에게 여전히 커튼콜은 아직 멀었다. 

글. 사진 김신영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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