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의 窓] 멍든 찻잎이 향을 낸다 /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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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박성희의 窓] 멍든 찻잎이 향을 낸다 /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
  • 출판사월간에세이
  • 잡지명월간에세이 Essay

향이 좋은 발효차 만드는 과정을 본 적이 있다. 잎을 돌려서 부서뜨려 멍들게 한 후 뜨거운 열로 찌고 다시 말리고 발로 꾹꾹 누른다. 상처가 나야 발효가 잘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연 상태의 찻잎은 외부로부터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통과 압력을 거친 후 비로소 명품차로 거듭난다.   

작은 찻잎이 외부의 압력을 받고 잠재된 향을 일깨우듯 인간도 그러할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적당한 어려움을 겪으면 철이 드는 건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고통을 일부러 찾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존재가 송두리째 망가지는 고통이라면 누구라도 피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다소 지루한 질문에 해답을 준 건 칠순을 훌쩍 넘긴 어느 여배우의 수상 소식이었다. 한국인 최초, 아시아계 두 번째로 오스카상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 이야기다. 그녀가 시상식장에서 보인 여유와 관조, 거기에 더해 내뿜는 진한 배우의 향기는 다름 아닌 오래 발효된 명품차 같은 향기였다. 윤여정은 이혼했기에 배우로 거듭날 수 있었고, 아이들이 있어 연기력을 키울 수 있었다고 스스로 밝힌 적이 있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걸어온 길의 끝에 디저트처럼 달콤한 성공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건 행운”이라고 말한 여배우가 또 있다. 영화 <로마의 휴일>로 유명한 오드리 헵번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점령 네덜란드에서 나치의 만행과 지독한 가난을 겪은 오드리 헵번은 고통을 지니고 과거에 묻혀 살기에 인생은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없이’ 삶과 화해했다고 했다. 충격을 흡수한 후 사랑으로 변환시킨 그는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전 세계 빈곤국을 다니며 전 세계 어린이에게 사랑을 전파했다. 그 오묘한 화학적 변화의 과정에 “고통이 도움이 되었다”라고 했다.

회화 <절규>로 유명한 노르웨이 화가 뭉크는 말년에 돈과 명성을 얻은 성공한 화가가 되었다. 그가 처음부터 돈과 명성이 있었다면 <절규>는 결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뭉크 자신도 말년에 “두려움과 질병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나바호 인디언들은 상처가 아름다움과 축복을 가르쳐주는 스승이라고 믿는다. 티베트의 수도승들은 지혜와 상처는 같은 것의 양 끝이며, 지혜는 치유된 상처에서 나온다고 가르친다. 지혜와 상처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인생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기도란 놓아줌으로써 상처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고 그 속에 숨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지혜의 여정이다. 고통에서 벗어난 인간은 감사함에서 우러나오는 편안함과 해방감을 느낀다. 북부 멕시코 산속의 원시인도 치유에 매달리면 오히려 질병에 주도권을 주는 것이라며 상처를 놓아주어야 치유가 된다고 믿는다. 

기원전 6세기경 고대 그리스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는 “고통을 통해서만 지혜가 나온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고통이 있는 인간은 그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 지혜를 이끌어내려 노력한다. 결론적으로 고통은 인간을 변화시킨다. 더 인간답고, 더 아름답게. 어찌 생각하면 인간의 삶의 공식에서 고통의 함수를 덜어내기가 불가능하기에 그 고통과 동반하며 사는 지혜를 수천 년에 걸쳐 가르치고 터득하며 오늘에 이르게 된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왜 나의 삶이 따듯한 목욕물처럼 안온하지 않은지 불만스러울 때, 왜 바깥세상에 아픔과 질병이 끊이질 않는지 안타까울 때, 무엇보다 고통의 그림자가 나의 작은 존재를 엄습하며 파고들 때, 우선 따끈하고 향기로운 차를 한잔 만들어야겠다. 그 차를 마시며 윤여정과 오드리 헵번과 뭉크와 나바호 인디언과 티베트 승려와 그리스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와 이 모든 이들을 떠올리면 고통이 좀 나아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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