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 달콤한 게으름 / 주철환 프로듀서·前 대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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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흐르는 강물처럼] 달콤한 게으름 / 주철환 프로듀서·前 대학교수
  • 출판사월간에세이
  • 잡지명월간에세이 Essay

은퇴 후엔 특집 인생을 살겠다는 결심을 선포한 적이 있다. 그동안의 삶이 직장의 시간표대로 움직인 정규 편성이었다면 이제부턴 내 의지대로 자유롭고 특별하게 인생을 기획하겠다는 취지다.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 때 기획 다음으로 하는 단계가 구성인데 방송도 소설과 마찬가지로 인물, 사건, 배경이 중요한 요소다. 

인물 중에 반드시 필요한 게 주인공인데 그건 당연히 나 자신이다. 주인공이 역할을 제대로 소화 못하면 프로그램은 존재감을 잃게 된다. 휘둘리지 말고 서두르지 말고 중심을 잡아야 한다. 사건은 뭐 그리 거창한 게 아니라도 무방하다. 소소한 일상의 만남에서 재미와 의미를 찾으면 그게 모여서 작은 감동이 된다. 배경은 겉과 속으로 나뉘는데 겉은 지리적 배경이고 속은 심리적 배경이다. 화려한 곳을 택하더라도 마음이 편치 않으면 그건 어두운 배경이 된다.

특집 인생의 머리글자인 특집에 미래의 나를 떠받칠 두 개의 기둥이 버티고 있다. 특은 특강, 집은 집필이다. 둘 다 내 뜻대로 추진할 수 없는 영역이다. 누가 불러주어야 하고 누가 읽어주어야 한다. 일기와 편지도 집필이라고 우길 수 있지만 나의 글쓰기는 그 숫자가 얼마이건 간에 미지의 사람들이 읽어줄 때 완성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길에는 종점이 있어도 글에는 정년이 없다. 학교엔 종강이 있어도 특강엔 종료가 없다. 단 특집이 특집다우려면 전문성을 계속 강화해야 하고 창의성을 계속 개발해야 한다. 성실성은 기본이다.

특강에선 미지의 다양한 사람들을 접할 수 있어서 좋다. 어쩌면 평생에 단 한 번, 첫 번째 대면이자 마지막 만남일 가능성이 큰 사람들이다. 바쁜 시간을 틈내서 온 분이 대부분이겠지만 시간이 남아서 온 사람도 더러는 있을 것이다. 구경삼아 온 분도 있고, 공부하러 온 분도 있고 심지어 평가하러 온 분도 몇 명은 있다는 게 내 경험적 판단이다.

진지한 표정으로 열심히 메모하는 수강생이 눈에 띄면 일단 조바심이 난다. 학구열이 대단한 건가. 혹시 본전을 뽑겠다는 심정 아닐까. 적당한 시점(대체로 강의 중반 무렵)에 나는 그분(지식 낚는 어부)에게 농담하듯 조언한다. 

“고기 다 잡으려 하지 마시고 그냥 그물에 걸린 고기만 건져 올리는 게 어떨까요.” 

그 말엔 두 가지 심정이 내포돼 있다. 첫째는 내 강의가 그렇게 일일이 받아 적을 만큼 요긴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스스로의 인정, 둘째는 속기사처럼 필기에만 신경 쓰다 보면 정작 현장의 펄떡이는 매력(?)을 놓칠 수도 있다는 주제넘은 걱정이다.

앞서 언급한 ‘그냥 그물에 걸린 고기’에서 나는 ‘그냥’이라는 단어에 주목한다. 그냥은 그와 냥(양)이 결합한 말인데 여기서 양은 모양(模樣)에서 나온 말이다. 그 모양 그 꼴로 살면 그 모양 그 꼴로 죽게 된다는 말을 어디선가 처음 들었던 그 당시엔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며 뉘우치는 계기로 삼았던 것 같은데 시간이 흐른 지금은 느낌이 사뭇 달라졌다. ‘그게 뭐 어때서’ 하는 자각이 들면서 반성보다는 오히려 반감(?)에 가까운 쪽으로 기울었다.

강연의 진행 순서는 어디서나 3단계다. 강사 소개, 강의, 질의응답이다. 장황한 소개는 강사를 민망하게 만든다. 저렇게까지 이력을 늘어놓아야 고개를 끄덕일 정도라면 인지도가 부족하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그냥(!) 이름만으로 눈빛이 모아진다면 그보다 좋을 순 없을 것이다. 유명 강사인데 강의 내용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글자 그대로 유명무실이란 소리가 터져 나온다. 유명한데다 실력까지 뛰어나면 명실상부라는 평가를 받게 되고 다음에 한 번 더 초대받게 된다. 

강의가 끝나면 객석 여기저기서 손을 든다. 강연장에서 나올 만한 질문도 대충은 예측 가능하다. 질문 중 예상 1위는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무엇입니까’ 혹은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나요’이다. 나의 답변도 대략 정해져 있다. 

“저는 가장이란 말이 가장 난감합니다. 수많은 좋은 것들에 순위를 매기는 게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냥(!) 이런 식이면 어떨까요. 이번 가을에 책 한 권 읽고 싶은 직장인에게 권하고 싶은 도서가 있다면…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 신부에게 권하고 싶은… 점점 세상이 허무하다고 느끼는 은퇴자가 펼치면 도움이 될 책이 있다면…. 

독서의 즐거움도 있지만 책 읽기의 괴로움도 여전하다. 그런 분들에겐 영화 보기를 권한다. 마음만 먹으면 극장에 가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영화를 볼 수 있는 세상이다. 나 역시 요즘 각종 동영상 서비스(흔히 OTT라고 부르는 영화바다)에서 고기 잡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지금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싶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출근을 서두르는 직장인이 있다면 2010년에 개봉한 영화 하나를 추천한다. 주인공은 줄리아 로버츠, 제목은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Eat Pray Love>이다. 거기에 ‘달콤한 게으름’(Dolce Far Niente)이라는 말이 여러 번 등장한다. 우리는 일만 하려고 태어난 게 아니다. 악착같이 억척스레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정신적으로 누더기가 된 자신과 마주할지도 모른다. 나는 아침마다 나를 설득한다. 오늘은 신이 주신 특별한 선물이다.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감사하자. 그 선물 혼자 독식하지 않고 나누면 내일은 더 좋은 선물을 주시겠지.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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