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발자국] 몸으로 읽는 책 ‘1page’ / 김혜연 무용수·안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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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첫발자국] 몸으로 읽는 책 ‘1page’ / 김혜연 무용수·안무가
  • 출판사월간에세이
  • 잡지명월간에세이 Essay

나이가 들수록 빛이 바래지 않았으면 하는 단어 중 하나, 처음. 경험치가 쌓일수록 ‘처음’이라는 단어가 낯설어진다. 그런데 어쩐지 아이러니하다. 우리가 ‘처음’이라 부르는 많은 일들은 ‘낯설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잠식하는 세월의 무게는 단어 본래의 감각을 마비시킬 만큼 압도적이다. 여전히 우리는 어른이라는 단어가 무겁게 느껴진다. 어른으로서 책임을 짊어지고 모든 것에 익숙하거나 친근하거나 여유로움을 가장하고 살아갈 뿐. ‘나이듦’이란 우리를 진실에서 멀어지게 하고 일상을 무뎌지게 만든다. 이런 일상의 우리, ‘처음’이라는 감각을 느껴본 적이 언제일까? 

세월의 무게를 무색하게 만들고, 저마다의 ‘처음’이 모여 ‘청춘’이라는 단어로 재탄생한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나에게서의 처음이 아닌 우리의 처음. 때는 2018년 겨울이다. 서른 명 남짓, <몸으로 읽는 책> 프로젝트를 위해 모두가 처음의 순간을 맞이했다. 이는 무용의 가치를 알리고자 기획한 프로젝트이다. 책이 중심이 되지만 텍스트를 읽는 것에서 나아가 다양한 예술 경험 즉, 무용, 연극, 글쓰기 등을 이용해 감각을 일깨우는 창작 활동이 주가 된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완전히 잠식되고 있는 ‘처음.’ 그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 사람들이 더욱 행복해지는 방법으로 그 중심에는 익숙함에 무뎌지고 의식조차 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는 ‘몸’에 대한 인식이다. 그 겨울, 20대부터 40대까지, 학생부터 회사원, 프리랜서 등 나이와 직업을 불문하고 모인 서른 명 남짓의 참여자들이 처음 만났다. 함께 창작한 작품으로 공연을 한다는 목표로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양손을 턱 아래에 받치고 어깨와 함께 으쓱거리는 움직임을 세 번 반복한다. 눈을 비비적거리고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기며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자르는 움직임을 한다. 이는 <몸으로 읽는 책> 참여자의 몸으로 하는 자기소개이다. 전원이 소개를 마친 후, 서로의 소개를 해석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 참여자가 머리카락을 자르는 모습을 유추해 이름을 맞추려고 했는데, 실연당한 현재의 마음 상태를 표현했던 것이다. 몸을 통한 표현이 처음이었지만, 다양한 감정과 상태를 표현해냈고 서로의 다름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두 달 동안 매 순간 처음을 맞이했다. ‘자신’을 주제로 글을 쓰고 대본을 만들었다. 놀이를 통해 움직여보고 안무로 발전시켜 1시간 분량의 창작물이 완성되어갔다. 무대 경험이 없는 이들이었지만 잘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저 스스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를 고민했고, 왜 하는지에 대해 생각했으며 그것을 표현하려고 머리를 쓰기보다는 행동했다. 호기심에 찾아온 이곳에서 일상에 균열이 일어나는 순간, 그 균열이 잠들어 있던 감각을 일깨우고 세월의 무게를 덜어내며 세상을 처음 마주한 어린아이의 설렘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응축된 ‘처음’이 드디어 무대 위에 오르는 순간, 언제나 관객이었던 20명의 일반인 출연자는 처음으로 공연자가 되었고, 처음 보는 관객들의 시선 속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무대가 익숙한 전공자들과 달리 난생처음 무대라는 공간에서 공연을 해야 하는 그 순간, 참여자들에게는 떨림, 긴장, 불안, 초조, 설렘, 기쁨, 온갖 감정과 감각들이 뒤섞였다. 그리고 온전히 그들 자신에게 몰입하고 서로 의지하며 공연은 성황리에 끝났다. 일 년에 수백 번의 공연을 하는 무용수이자 작품을 만드는 안무가로 활동하면서 적게는 50회 정도의 공연을 보러 다니는 관객이기도 하지만, 생에 최고의 공연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몸으로 읽는 책>이다. 화려한 기교가 없어도 처음 공연에 도전한 이들이 가진 순수한 결정체, 집중과 진심 그리고 열정은 긴 여운을 남겼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면 언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실로 중요한 것은 교감일지도 모른다.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몰입, 서로를 챙기려는 마음, 서로의 상태를 세심히 살피고 묵묵히 옆을 지켜주는 자세. 누군가를 감동하게 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힘에는 포장이 필요 없다. 보이지 않는 그 힘은 바로 몸의 감각으로 전달된다. 그 본질을 깨우치게 해준 <몸으로 읽는 책>이다. 그래서일까 ‘처음’과 ‘도전’이라는 단어를 결합하면 새로운 영감이 떠오른다. 처음이라는 설렘의 응축이 만들어낸 가장 순수했던 결정체가 아직도 몸속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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