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 이 사람] 겨울의 제프 버클리 / 조혜림, 음악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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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클릭! 이 사람] 겨울의 제프 버클리 / 조혜림, 음악 프로듀서
  • 출판사월간에세이
  • 잡지명월간에세이 Essay

처음 제프 버클리(Jeff Buckley)를 알게 된 건 학생 시절 Y언니의 남자친구 가브리엘을 통해서였다. Y언니가 휴학 후 차린 학교 근처 빈티지 숍에는 유럽 어딘가에서 흘러온 듯한 화려한 패턴의 원피스와 예스러운 장신구들, 그리고 80년대 보그(Vogue)에 소개될 것 같은 독특한 구두들이 넘쳐났다. 언니의 숍에는 이전 주인이 두고 간 낡고 커다란 스피커가 있었다. 나는 옷이나 액세서리보다 수수한 이 스피커가 마음에 들었고, 수업이 비는 날이면 언니의 가게에 들러 이것저것 음악을 듣곤 했다. 

가브리엘은 종종 우리를 불러 앉혀놓고 시시콜콜한 꿈 이야기를 했는데, 그 끝에는 꼭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곤 했다. 언니는 그를 예비 음유 시인이라 불렀고, 나는 한량이라 했다. 첫눈을 기다리던 쌀쌀한 날에도 한량은 노래를 불렀다. 추위에 몸을 양팔 가득 안고 언니의 숍으로 들어갔을 때 그가 선곡한 곡이 제프 버클리의 <Je n’en connais pas la fin>과 <Hallelujah>였다. 그날 무슨 바람인지 가브리엘은 고국 캐나다에서부터 가져온 낡은 기타와 우쿨렐레, 만돌린을 주섬주섬 꺼내 이름을 알려줬지만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잠깐 음유시인으로 보일 만큼 그의 노래는 좋았다. 그의 연주와 목소리를 배경음 삼아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덧 언니와 내 손에 들린 맥주캔이 바닥을 보였다. 빈 캔을 지긋이 바라보던 Y언니가 “이렇게 추운 날에는 와인을 한잔 마셔야 해”라며 몸을 일으키려 할 때, 엉뚱하게도 가브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타를 맨 채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겨울밤의 골목 속으로 달려 나갔다. 

“쟤 지갑도 안 가져갔는데?” 

“술 취하면 꼭 저래. 내버려 둬.” 

언니는 작년 크리스마스에 길에서 데려왔다는 고양이 크리스의 회색 털을 쓰다듬으며 그가 사라진 유리문 밖 어둠을 바라볼 뿐이었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열린 유리문 사이로 매섭게 차가운 공기와 가브리엘이 밀려들어왔다. 그는 코끝과 양 볼이 붉어진 채 와인 두 병이 든 검은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내 질문에 그는 건너편 큰 도로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다 왔다고 했다. 밖에 나가서야 돈 한 푼 없는 처지를 깨달았다나. 길에서 잠시 고민하던 그는 선 자리에서 기타 연주를 하며 제프 버클리의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노래를 부른 지 20분 정도 지났을까? 길을 지나가던 노부부가 2만 원짜리 지폐를 그의 발 앞에 두곤 손뼉을 치며 웃었다고 한다. 그 길로 그는 편의점에 들어가 싸구려 와인 2병을 사 들고 기쁘게 숍으로 돌아왔다. 그 순간 미시시피강에 몸을 던져 요절한 천재 제프 버클리의 목소리가 내게는 외투에 가득 벤 차가운 바람과 한 병에 만 원도 하지 않는 편의점 와인의 투박하고 씁쓸한 포도 향으로 박혔다. 그날 길을 걷던 노부부에게 제프 버클리는 겨울날 발걸음을 멈추게 한 낯선 외국인의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작년 12월 초, 촬영차 방문한 인천 헌책방 거리의 한 서점에서 제프 버클리의 <Grace> 앨범을 발견했다. 이 앨범은 사장님의 소장품으로, 카운터의 낡은 턴테이블 옆에 정갈히 비치돼 있었다. 내가 아는 체를 하자, 사장님은 종일 이 앨범을 틀어 두었다고 했다. 오늘 이 서점에 들른 이들에게 제프 버클리는 조금 쿰쿰한 헌책 냄새 위에 내려앉은 겨울의 음악이려나. 그의 멜로디 아래서 누군가는 소설 독서를, 누군가는 옆자리 연인과 사랑의 눈빛을 나눌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엉뚱한 장소에서 기억하겠지. 지금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노래가, 어느 옛날 내가 들은 적 있는 음성이라는 것을.

지금 내게 제프 버클리는 무뎌진 귓가에 속삭여 계절의 감각을 깨우는 알람이며 Y언니이자 가브리엘이다. 포도 향이자 찬바람이다. 노부부의 먼 웃음소리이며 헌책방의 연인이다. 그 모든 추억이 얽히고설킨 겨울이다. 어느덧 따뜻한 와인과 제프 버클리의 목소리와 함께 길고 긴 겨울을 맞이할 때가 됐다. 내년 겨울의 나는 어떤 추억으로 제프 버클리를 떠올리게 될까?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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