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읽다] 해는 졌지만, 나는 지지 않았다 / 최재훈,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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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영화를 읽다] 해는 졌지만, 나는 지지 않았다 / 최재훈, 영화평론가
  • 출판사월간에세이
  • 잡지명월간에세이 Essay

몇 해 전, 오래 인연을 맺어 친분이 있었던 한 편집장이 전화를 했다. 제법 오래 다닌 직장을 그만두고 제 삶을 찾아 떠난다 했다. 나는 적당히 해 줄 말이 없어서 멍했다. 남들이 보기에 꽤 적당한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적당히 잘 웃고, 적당히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적당한 직장에, 적당해 보이는 여러 가지 것에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했다. 남들과 비교해 이 정도면 괜찮다고 할 만한 그런 사람이었다. 

적당히 축하 겸 위로의 말을 건네고 나니 문득 내 삶은 괜찮은지 궁금해졌다. 그날 이후 불쑥 시간의 돌부리에 걸려 털썩 주저앉는 날에는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지, 이런 상태로 내일을 맞이해도 후회가 없을지 자꾸 묻게 된다. 그리고 내가 내 인생의 편집장이 되어 지지부진한 내 삶의 어떤 꼭지를 폐지할 수 있다면 무엇을 없애고 무엇을 신설할지 상상해 본다.  

라이언 머피 감독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주인공 리즈(줄리아 로버츠)는 남들과 비교해 완벽해 보이는 삶을 살고 있지만, 정말 자신이 이 삶을 살고 싶은지 질문이 생긴다. 그 답을 찾기 위해 일, 가족, 연인 모든 것을 뒤로하고 1년 동안 여행하기로 한다. 영화의 제목처럼 이탈리아에서는 신나게 먹고, 인도에서는 기도하고, 발리에서는 사랑을 한다. 그런 시간을 보내면 비로소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지 순례자처럼 질문하고 답을 찾아간다.

어떤 관점에서 리즈의 고민은 배부른 투정처럼 보일 수 있다. 1년이나 경제적인 고민 없이 외국에서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부럽기도 하다. 하지만 적당히 사는 삶이 아니라 온전히 내 인생의 주인이 되고 싶은, 리즈가 가진 고민의 무게는 가벼운 것이 아니다. 힘들다는 핑계로 단순히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단단하게 맞서겠다는 용기는 우리 자신에게도 필요한 것이라 리즈의 여행을 응원하게 된다. 

여행과 자아 찾기라는 낭만적 주제에 비해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꽤 진중한 질문을 가지고 좀 더디게 간다. 사실 이탈리아, 인도, 발리의 압도적 풍광을 담아냈다면 관객들은 훨씬 더 쉽게 매혹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 풍경은 그다지 풍부한 표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라이언 머피 감독은 이국적 풍경보다는 리즈가 만나는 사람과 그 관계에 집중한다. 그래서 이야기는 여행이 아니라 리즈라는 한 여인의 삶에 더 가깝게 다가간다.

뉴욕에서 친구가 리즈는 남자에 맞춰 옷을 입는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어쩌면 흘리듯 던진 친구의 말이 리즈가 길을 떠나게 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1년 동안 리즈는 내 삶의 온전한 주인이 되어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찾아온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밀어낸다. 하지만 저울질하느라 자신의 진심이 무엇인지 들여다볼 충분한 시간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온전한 자신이 되려면 타인의 사랑도 받아들여야 한다.

원작에 비해 리즈의 마음을 흔드는 마음의 격랑이 충분히 설명되진 않아 아쉽지만 줄리아 로버츠는 리즈라는 인물이 되어 관객들의 마음이 자신과 교감할 수 있게 설득한다. 머피 감독은 해피엔딩을 위장하지 않고 리즈의 삶을 온전히 열어둔다. 그래서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내 삶의 주인이 되고 싶은 관객들에게 꼭 여행을 가지는 않더라도 마음의 주인이 되어 굽이굽이 접힌 마음을 따라 한번 걸어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돌멩이처럼 뭉쳐진 채 2021년이 사라졌다. 새 해에는 리즈처럼 훌쩍 떠나, 새롭게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면 어떨까? 그러다 보면 문득 그리워지는 것이 있을 것이다. 내가 처음 사랑했던 날씨, 그날의 감정, 그리고 그날의 냄새, 내 살갗에 닿았던 바람의 향기, 그러다 보면 그 시간 속 설레었던 나 자신을 다시 사랑하고 싶어질 것이다. 어제의 해는 졌지만, 나는 지지 않았기에….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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