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사월간에세이
- 잡지명월간에세이 Essay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의 <갈릴레이의 생애 Leben des Galilei>에는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과 그들이 겪는 사회적 곤경에 대해 묘사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나에게 예술가로서의 사회적 책임과 곤경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었다. 과학자가 겪는 사회적 책임은 의사들의 히포크라테스 선서와도 같다. 그런데 과학자의 가설을 뒷받침하기에는 ‘진실’이라는 가설을 증거로 둘 수 있고, 이를 반박할 이들에게도 ‘가설’이라는 진실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비해 예술은 어떤가. 예술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는 지극히 가변적이다. 모순되게도 예술가가 제시하는 ‘진실’은 그들의 ‘가설’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진실은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으로 이를 뒷받침할 요소는 자신의 결정이 유일하다. 이렇듯 임의적이고 개인적인 요소로 인해 외롭고 불안한 저항이 시작된다. 하지만 그렇기에 예술은 비밀스럽고 더없이 내밀하게 느껴진다.
새로운 음악을 배우고 연주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알 수 없는 의식의 뿌리를 찾아 나서는 불완전한 내 모습을 다각도로 바라보며 각인하고, 부수고, 재창조하는 과정이다. 종종 전시관의 한구석에 앉아 한 작품만을 응시하며 끝없이 다시 그리는 화가들처럼. 이 과정으로 잉태된 ‘음악적 해석’이라는 요소. 이는 수학자나 과학자가 논리에 근거를 두고 하는 ‘해석’과는 달리 ‘해석’에 기점을 둔 본인의 논리가 허용되는 것이다. 이로써 예술은 그 어떤 학문보다 강한 저항력을 지니며 내용에 힘을 싣는다.
피아니스트였던 할머니에 이어 같은 길을 걸어온 어머니가 내게 쥐여 준 첼로라는 악기. 이는 나를 예술이라는 거대한 장막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 준 작은 열쇠이자 이 세상에서 나만의 ‘삶’이라는 그림을 몇 번이고 덧칠하며 그리게 해 준 한 자루의 붓과 같았다. 이 암막으로 들어가면 나는 세상의 정치와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세상을 아는 듯 모르는 척해도 암묵적으로 용인되었고, 그 커튼 속에서 나만의 판타지를 펼치거나 내 나름대로 평가절하의 시간을 거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예술을 통해 현실이라는 세상 밖으로 나가게 만들어 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토끼 굴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막상 들어온 예술이라는 비밀스럽고 거대한 공간, 이곳에서 잠시 뒤돌아본 세상은 내가 음악을 시작하기 전 선대(先代)와 부모님의 음악 인생을 통해 간접적으로 상상한 것과는 달랐다. 여성이 악기를 다루는 것조차 조심스럽게 여겼던 그 시절 할머니가 마주한 사회도 더는 아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걸어온 음악계와 비슷하면서도 모든 면에서 너무나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변해버린 유토피아이자 카오스 그 자체였다.
발전하는 인류와 더불어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이 만연하는 이 사회에서 그들과 나, 예술을 하는 우리는 어디에 존재해야 하는 걸까. 어릴 적부터 예술은 ‘내가, 지금, 살아있음’을 가장 직관적으로 느끼게 한 유일한 진실로서 내 삶 곳곳에 존재했다. 하이네와 헤르만 헤세의 시는 상처받은 내면에 말을 걸고, 고전 연극에서는 대사가 행동을 보충한다. 또한 17세기 플레미시(Flemish) 정물화, 종교화, 인상파의 작품은 더욱 직감적으로 다가오는 카타르시스적인 연민을, 마지막으로 음악은 예술이라는 상자의 바닥에 남아 이 모든 것을 내포하는 존재 자체로 개체성과 물질세계를 초월한다.
예술은 ‘영원’과 ‘허무’를 동시에 상징하는 역설적이고 독자적인 요소이다. 그리고 나와 수많은 동료, 그리고 스승이 선택한 외로운 결정이기도 하다. 순환하는 본질이며 멈춰있는 시간이 우리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예술이라는 삶의 방식은 역사 속 정물화(Still life 또는 Stillleven)와 닮아있다. 제철에 맞게 익어서 아름답게 놓인 정물. 하지만 이 아름다움에 내재한, 머지않아 부패할 비극을 맞이할, 문명의 풍요와 종말을 암시하는, 과일 광주리와 죽은 생선의 나열처럼 오묘한 조화가 주는 복선이 예술을 아름답게 한다. 그렇게 더더욱 아직, 살아있음(still, Life)을 느끼게 하는 인류의 정물화. 이것이 지금의 내가 바라보는 예술의 모습이다.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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